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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y/게으른 낙서질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2004.02.07 13:23



어젯밤.. 서울로 들어오니 서울엔 그다지 눈이 많이 온 것 같지 않았다.
조금전까지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_- 서울로 달려온 나에겐 한편으론 허탈하기도, 한편으론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옆에 같이 타고 온 사람과 가장 먼저 한 소리는 '드디어 서울이다~'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던가..
그동안 구미에서 출퇴근할 때만 끌고 다니던 나의 애물단지 누망(혹자는 르망이라 부르기도 하는-_-)을 끌고 서울로 오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아침 출근길에 눈발이 약간 날리길래 차 가지고 가는 건 포기하고 기차를 타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을 마치고 나오니 날씨가 괜찮길래 그냥 몰고 오기로 했다.

6시가 약간 넘어 출발해서 7시쯤 추풍령 휴게소에 들릴 때까지는 순탄한 길이었다. 저녁을 못 먹고 출발했기에 휴게소에서 라면과 만두로 저녁을 해결하고 다시 서울로 향하기 시작했는데..

추풍령 휴게소를 출발해서 얼마 있지 않아서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눈이 내게로 다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에 신기해하며 같이 출발한 사람과 둘다 요즘 흔하디 흔한 디지털카메라나 카메라휴대폰 하나 없는 걸 아쉬워하며 사진이라도 찍어가야 하는 건데 안타깝다며 화기애애하던 우리의 분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극도의 긴장으로 바뀌었다. 옆에 앉은 사람은 서울에도 눈이 내리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여기저기로 전화를 돌려댔고, 고속도로에 있는 모든 차들은 비상 깜빡이를 켠 채로 20-30km의 속도로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정말 살다살다 그렇게 무섭게 퍼붓는 눈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와이퍼는 앞유리에 들러붙는 눈을 밀어내기 위해 쉼 없이 움직였고, 어느새 도로 위로는 눈이 쌓이고 있었다. 멋모르고 차선을 바꾸려던 나는 바퀴가 미끄러지는 걸 느끼고는 깜짝 놀라 그 후로는 앞 차의 꽁무니만 졸졸졸 쫓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상태에서는 오늘 안으로 집에 들어간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고, 조금만 더 있다간 길이 온통 마비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30분 가량이 넘어서자 눈발은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고, 다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무시무시한 폭설지대를 두 번 더 만났지만 우리는 다행히도 별 탈 없이 10시 반경 서울 톨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었다.

정말 죽다 살아난 하루였다.
나를 무사히 집까지 태우고 온 나의 르망에게 너무도 고마웠다.
모두들 내가 내 차를 고속도로에 올린다고 했을 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기 때문에 나는 일종의 오기가 생겼더랬다.
구미 내려갈 때도 별 탈 없이 잘 갔는데, 못 올라갈 이유도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작년 6월 구미에 가지고 내려가서 세차 한 번 하지 않고 타던 그놈을 정말 너무 더러워서 못 봐주겠다 싶어 1월 1일에 처음으로 세차를 해주고 나니 나름대로 예뻐보이기도 하는 거였다. 한 번 세차를 하고 나니 먼지 묻고 때가 타는 게 신경이 쓰이는 게, 없던 애정이 생긴 것 같았다. 거 참 기특하지.. 눈이 내렸다 녹을 때마다 지저분해지는 것 같아 한 번 더 세차를 해줬고, 어제도 출발하기 전에 세차를 하고 올 셈이었는데, 너무 추워서 세차장을 가동하지 않는다길래 할 수 없이 기름만 넣고 출발했던 거였다. (눈을 그렇게 많이 맞은 걸 보면 세차 못 한 게 다행이다 싶다, 흠흠..)

이제 처분할 때가 다 되어오니 새삼 그놈이 예쁘고 고맙게 느껴지다니..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차를 새로 사긴 할 것 같다. 정말 사고 싶은 차가 생긴 것 같기 때문이다..
꽃피는 봄이 오면..